경제
[교사 김혜인] 카페에서 이웃집 아이 엄마를 우연히 마주쳤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까지 30여 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단 1초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듯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웃집 엄마는 내게 평소 물어보고 싶었다면서 아이 영어 교육은 언제부터 시킬 예정이냐고 물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에 너무 당황해서 몇 초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곧 나도 모르게 실소하며 “우리말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다 시간이 되어서 더 얘기를 나누지 못한 채 우리는 급히 헤어졌다.
영어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영어를 잘하면 어떤 이점이 있는지도 충분히 안다. 그러나 아이가 모국어 습득조차 지연되는 마당에 영어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우리말 음성언어 대신에 글자 카드나 그림 상징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AAC(Augmentative Alternative Communication)를 고려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아이가 영어 알파벳에 관심을 보였을 땐 오히려 조금 우울했다. 숫자나 문자에 대한 제한된 관심은 까치발을 들고 다니거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발달 지연 아이가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알파벳을 가르쳐줬더니 주차장 벽에 쓰여 있는 ‘SLOW’를 보고 “에스 엘 오 더블유!”라고 읽으며 웃는다. 그게 ‘슬로우’라는 한 단어인 것에도, 그게 의미하는 바에도 관심은 없다.
그러나 아이가 문자를 좋아하고 그에 안정감을 느끼기에 나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내가 점토를 이용해서 알파벳을 만들자, 아이가 그토록 싫어하던 점토를 꺼내어 만지기 시작했다. 내가 모래 위에 알파벳을 써 주자, 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모래를 놀잇감으로 삼게 되었다.
아이가 옷 입기를 거부할 때는 옷에 쓰여 있는 알파벳을 보여준다. “이걸 입으면 언제든 알파벳을 볼 수 있어.” 신기하게도 이 방법이 아이에게 통한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알파벳이 적혀 있으면 아이에게 말해준다. 그러면 아이는 낯선 공간에 들어갈 용기를 낸다. 내 모습이 남들 보기엔 영어 교육에 열성 있는 엄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아이 발달센터 치료실 옆 건물은 영어 유치원이다. 유치원 선생님이 통학버스에서 내리는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영어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풍경을 자주 봤다. 만일 내 아이가 발달이 느리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영어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만 2세 반으로 진급했다. 만 2세 반부터는 특별활동으로 영아 놀이 영어 수업이 있다고 한다. 그 소식이 반가웠다. 아이가 새 반에서 새 선생님을 만나서 모든 게 낯설고 힘들 텐데, 부디 알파벳이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어서 적응에 도움이 되길.
오늘은 남편과 함께 아이 영어 이름을 지어 봐야겠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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