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2016년 가을 은퇴 후 첫 일 년 동안 갭이어를 갖기로 하고, 그 비용은 2000만 원을 책정했다. 소시민에게는 큰돈이지만, 일 년 동안 원 없이 여행하겠다고 벼르는 입장에서는 그리 넉넉한 여비가 아니었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싼 항공권과 숙소를 찾았고 땡처리 패키지 상품을 물색했다. 한 푼이라도 아껴 한 번이라도 더 여행하는 게 내게는 중요했으므로.
69만9000원짜리 7박 9일 튀르키예 일주 상품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도 바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게다가 국적기를 이용한다니, 여비를 아끼기 위해 늘 경유편만 타고 다닌 내게는 황송한 상품이었다. 샤프란볼루, 안탈랴, 쉬린제, 트로이 등 이전 튀르키예 여행 때 빠진 곳이 들어간 점도 매력적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예약했다.
그 후 출발하는 날이 왜 이렇게 안 오느냐고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는 동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수도인 앙카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2016년 10월 튀르키예는 갑자기 여행하기에 위험한 지역이 되어버렸다. 하필 출발 며칠 전에 그렇게 되고 보니, 남편이 여행을 취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우리 세대에게 ‘군부 쿠데타’니 ‘계엄령’이니 하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공포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도 떨떠름한 판이라, 다른 여행지를 물색하기로 하고 여행사에 취소 의사를 밝혔다. 그랬더니 그 상품은 계획대로 진행할 예정이므로 취소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단다. 그런데 출발이 코 앞이다 보니 여행사에 낸 돈 대부분이 날아가게 생겼다.
나는 도저히 그 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남편은 “목숨이 중하지, 그깟 돈이 중하냐?”며 극구 만류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혹시 시가전 같은 게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하는 불길한 생각에 맘을 졸이다가 ‘설마 이방인에게 총을 들이대기야 하려고’ 하며 맘을 달래길 반복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도착한 이스탄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경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관광 명소마다 거짓말처럼 여행자 발길이 뚝 끊겨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하기야 소피아’ 앞 광장에는 여행자보다 경찰의 숫자가 더 많았다. 이스탄불의 종교적 심장인 블루 모스크도 텅 비어 있었다. 이스탄불에 몇 차례 갔지만 그런 상황은 처음이라 영 적응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빴다는 뜻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가는 곳마다 사람이 너무 없으니 기이한 느낌이 드는 한편으로 편리하기도 했다. 줄을 설 필요가 없으니 시간이 절약되었고, 사람이 없으니 이리저리 치이지 않고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더 좋은 건, 현지인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는 점이다. 원래도 튀르키예 사람들은 친절한 편인데, 그때는 더더욱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위험하다며 다들 발길을 끊었을 때 찾아준 우리가 고맙기 그지없는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가게에서, 길거리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진심 어린 호의를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게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스탄불 숙소가 힐튼호텔로 업그레이드 된 까닭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비록 10월이 여행 비수기라고는 해도, 저가의 패키지 상품 원래 숙소가 5성급이었을 리 없다. 그런데 이스탄불에서의 2박 모두 힐튼호텔에서 재워주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엄령이 내려진 앙카라에서는 삼엄한 분위기에 위축되었지만, 어차피 거기는 잠자러 가는 곳에 불과하니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그 밖의 일정에 있는 도시에서는 어떠한 불편도 느끼지 못했다. 여행사에 낸 돈을 생각한다면 호강하고 왔다고 할 수 있다.
위약금 물기 싫어서 강행했던 튀르키예 여행은 결과적으로 가성비 좋았던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여행작가 신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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