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
한국의 스포츠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의 학교체육 현실이나 선수들의 의식 등을 생각할 때 도저히 일어나기 힘든 일로 보인다.
철강회사 첨단 엔지니어가 경보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슈퍼마켓 채소 담당 직원이 마라톤 2시간 6분으로 1위를 했다. 둘 다 일반인이 아니다. 직장인으로 일하며 운동하는 일본 최고 수준의 ‘엘리트 선수.’ 노동·운동을 함께 하면서 놀라운 성적을 냈다. 한국에도 있는 일인가?
2월 ’일본 선수권‘ 20km 경보에서 야마니시 토시카즈 선수(29)가 1시간 16분 10초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을 26초 당겼다. 현재 한국기록은 1시간 19분 13초.
지난 2일 ‘도쿄 마라톤’에서 이치야마 츠바사 선수(29)는 일본 역대 9위인 2시간 6분으로 일본 선수 가운데 1위. 올가을 ‘도쿄 세계선수권’ 기준 기록(2:06:30)도 넘어섰다. 일본 최고 기록은 2시간 4분 56초.
이에 비해 24년 한국 최고 기록은 2시간 13분 6초. 한국기록은 이봉주 선수가 25년 전에 세운 2시간 7분 20초.
두 종목 모두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크다. 마라톤 두 나라 실력 차는 한국에서 전문선수와 일반인의 차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의심할 정도. 웃을 수도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야마니시는 일본 최고 대학인 교토대 물리공학과를 나왔다. 토요타 자동차 계열 아이치 제강에 정사원으로 들어갔다. 단순한 운동선수가 아닌 정규직원이라 새벽에 개인 훈련을 하고 출근한다. 정상 업무를 마친 뒤 저녁에 다시 훈련하는 방식으로 경보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세계선수권 20km 경보에서 연속 우승했다. 세계 단체경보선수권도 2번 우승. 도쿄 올림픽 동메달도 땄다, 세계 정상급.
그는 중학 때 육상을 시작했다. 고교 입학 전까지 경보가 어떤 종목인지조차 몰랐다. 대회를 본 적도 없었다. 육상부에서 선배들을 보고 ‘경보’에 눈을 떴다. 수업 시간 집중은 기본. 1학년 때부터 하루 7시간 수업을 다 듣고 난 뒤 연습했다. 평일 훈련은 2시간 정도.
그러면서 3학년 때 세계청소년육상선수권대회 10,000m 경보에서 우승했다. 정상 학교생활을 다 하는 선수가 일본 대회도 아니고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는 경우를 한국 체육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학교체육 관계자나 부모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운동부가 강한 사립대들로부터 입학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입시를 거친 교토대 입학. 중학 때부터 운동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한 결과다.
교토대에는 전문 코치가 없었다. 혼자서 훈련했다. 제어공학을 전공하면서 4학년 때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땄다. 졸업 논문은 “부분 공간 동정법을 이용한 신호의 주파수 추정.” 그야말로 공부하는 선수였다. 꼴찌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서울대 선수들과는 다르다.
야마니시는 “육상에 대한 이해가 깊은 회사여서 일하며 운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회사가 세계선수권 여러 번 우승한 일본의 간판선수라 해서 특별대우 해주지 않는다. 그냥 사원일 뿐. 국가대표라면 소속사·협회·정부·사회가 온통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우대해 주기를 바라는 많은 한국 선수들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 “일하며 달리는 것에 불만은 없다. 나보다 더 많이 일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일본의 실업단 선수들은 일반 회사원과 똑같은 연봉을 받는다. 국가대표가 되면 약간 더 받는다. 회사 업무를 빼 주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 선수가 일하며 운동한다. 기업이든 지자체든 선수들이 훈련·경기에만 전념하는 한국과는 매우 다르다.
그는 미래 걱정도 많이 한다: “경보를 계속할수록 회사에서 첨단 기술을 다루는 엔지니어로서의 경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경보를 계속하는 것이 사회인으로서 위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솔직한 고민. 세계 최고 선수이기에 앞서 직장인임을 실감케 한다.
아이치 제강 육상부 경보 선수는 3명. 이번 대회 모두 다 10위안에 들었다. 오로지 운동만 한다고 좋은 성적을 내는 법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한국에서는 공부도 운동도 뛰어나게 다 잘하는 야마니시를 특출한 선수 또는 천재라 부를지 모른다. 아주 예외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대학 ‘마라톤 동아리’ 활동을 하며 혼자서 달리기 연습한 실업 육상부 신인이 지난 1월 ‘오사카 국제여자마라톤 대회’에서 일본 1위를 차지했다. 그녀 역시 지역 최고 고교를 나와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2월8일 칼럼). 일본에는 공부도 운동도 다 잘한 선수가 많다.
야마니시가 우승한 경보 대회에서 3위를 한 요시카와 아야토 선수(24)와 4위 하마니시 료 선수(25) 두 사람은 직장 동료. 여기에 ‘도쿄 마라톤’ 1위 이치야마까지 3명 모두 슈퍼마켓 ‘벨크스’의 지역 점포에서 일한다.
이들은 대학 시절부터 이름 날린 일본 육상 최고 선수들. 그러나 슈퍼마켓에서 화·수·목·토 주 4일, 5시간씩 근무한다. 각자 과일·채소·반찬 부문에서 발주·상품 진열 등을 맡고 있다. 오전 5시 30분부터 새벽 훈련.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근무. 그리고 다시 훈련. 다만 큰 대회 전에는 회사가 근무 시간을 다소 줄여 준다.
마라톤 이치야마: “일하며 달리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나보다 더 많이 일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경보 요시카와: “하마니시가 같은 방식으로 일하면서 파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모습을 지켜봤다. 일을 마친 뒤 훈련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마니시는 파리 올림픽 대표로 뽑힌 뒤에도 여전히 주 4일 근무했다. 근무 시간만큼 훈련 시간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연습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생겼다”며 그런 생활 습관 덕분에 더욱 강해졌다고 자부한다. 슈퍼마켓 육상부 선수 거의 모두 인사부·기획부·지역 매장 등에서 일하며 운동한다.
일본 육상 선수 대부분은 실업단 소속 직원. 연봉은 일반 직장인처럼 근무 연한에 따라 받는다. “1,000만 엔 넘는 선수가 극소수인 엄격한 업계.” 그런데도 육상에 선수가 몰린다. 실업 육상부는 800개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날마다, 온종일 연습해야만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는가? 일본 최고 선수들의 일상은 그런 공식이 잘못된 것임을 실증한다. “공부에 몰두하면 운동은 언제 하나?” “일하면서 운동은 무리”라는 불평도 잘못됐음을 일본 선수들은 증명한다.
가장 최근의 최고 기록만으로도 한국은 20km 경보에서 3분 이상, 마라톤에서 7분 이상 일본에 뒤진다. 경보는 800m가량, 마라톤은 2km가량 떨어진다. 일본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저 멀리 가 있다. 언제 따라잡을 것인가? 한국은 학교체육부터 모든 스포츠의 구조와 의식을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
손태규 칼럼니스트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