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2014년 여름, 로마로 들어가 밀라노에서 나오는 항공권을 이리저리 검색하다 보니 핀에어(핀란드항공)가 제일 저렴했다. 헬싱키 스톱오버 수수료도 무료라고 했다.
이외에 내가 핀에어에 끌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1970년대에는 해외 펜팔이 유행했다. 나 또한 여러 나라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핀란드에도 여러 명 있었다. 그 당시에 친구 만나러 나라 밖 여행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핀란드에 친근감을 느끼는 게 전부였다.
그랬는데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옛 친구들 나라에 갈 수 있다니 감개무량했다. 물론 그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건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하지만 이 결정을 후회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안 걸렸다. 헬싱키 중앙역 앞 버스터미널에 내린 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분통이 터졌으니 말이다.
중앙역 근처에 있다는 호텔을 예약했는데, 난생처음 발을 디딘 도시에서 동서남북을 가늠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럴 때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제일 쉬운 행동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호텔 이름을 보여주며 물어보는 것 아닐까?
“익스큐즈 미.” 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통상 여행자가 길을 물으면 일단 들어보고 다행히 아는 곳이면 일러주는 거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다. 내가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그런데 헬싱키 사람들은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 쌩 지나갈 뿐이었다.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조차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지독한 쌀쌀맞음으로 말을 건 이가 모욕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말을 거는 족족 그러니, 옛 친구의 나라고 뭐고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 도시에 도착한 지 고작 10분 만에 나는 헬싱키 스톱오버 신청한 결정을 후회했다.
어찌어찌 호텔을 찾아가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간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조식 포함 1박에 13만 원짜리 방이었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핀란드 물가에 대해 들은 말이 있으므로. 그래도 방이 그렇게 비좁고 삭막할 줄은 몰랐다.
더 큰 문제는 에어컨이 없고 장난감 같은 탁상용 선풍기가 놓여 있을 뿐인데, 그해 7월 말 헬싱키가 몹시 더웠다는 점이다. 어지간하면 피곤하여 방에서 쉬고 싶은데, 도저히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중앙역 근처를 돌아다녔다. 내가 보기에 헬싱키는 고풍스러운 맛이나 독특한 색채는 없고, 그저 아담하고 깨끗한 도시였다. 여행지로서는 매력이 덜하다는 의미다. 유럽에는 역사가 유구하고 개성이 강한 도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헬싱키는 거기에 또 다른 약점이 있었다. 이미 쌀쌀맞은 사람들한테 정이 떨어진 상태인데, 마트에서 먹을거리를 사다가 다시 뜨악해졌다. 500ml 생수 한 병에 1.8유로(2700원)였고, 다른 물가도 중부나 남부 유럽보다 두 배쯤 비싼 것 같았다.
헬싱키에서 일주일 체류 일정으로 스톱오버 신청한 것을 다시금 후회했다. 우리 부부 주머니 사정으로는 도저히 그 일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조금 나은 호텔로 옮기고, 헬싱키의 고물가를 감수하자면 준비한 여비가 다 떨어질 판이다. 그러면 보름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무전여행을 해야 하니 딱한 노릇 아닌가.
다행히 호텔은 1박만 예약했으므로, 취소하고 환불받는 거추장스러운 절차는 밟지 않아도 되었다. 헬싱키에서 가까운 에스토니아 탈린이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권하는 글들을 보고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 신의 한 수가 된 셈이었다.
헬싱키에서 두어 시간 보낸 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음 날 떠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헬싱키의 고물가에 굴복해 피난을 떠나는 심정이었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이지혜 기자 imari@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